진실
그녀는 그것들이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것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자전적 이야기에 우리가 흔히 부여하는 이미지,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는 어떤 고정된 이미지에 우려를 표시한다. 그녀는 그러한 글들이 자신에 대한 발견이 아니라 보다 일반화되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분석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나는 그녀의 대답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가 그동안 그녀의 글들에 대해 품은 오해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그녀의 글들을 단순히 자신의 삶을 폭로하듯 써내려간 일기로 치부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한 가지 독특한 방법으로 사물을 경험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편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싶다.” p.57
그녀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글쓰기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타인 속에 용해시키는 것이다. 거리두기를 통해 객관화시키거나 가장 정확한 단어와 문장을 찾아냄으로써 그녀는 그러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듯이 보인다. 글쓰기의 가장 강렬한 기쁨을 자신이 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 결국 그녀의 글쓰기는 (흔히 그녀에 관해 알고 있는 많은 독자들이 하는 오해처럼)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은밀한 '기록'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한 치열한 '탐구'인 셈이다.
“삶과 글쓰기라는 두 차원을 동시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그녀. “글쓰기 이전에는 현장에 없던 것을 발견하는 것, 바로 거기에 글쓰기의 희열이 있다.”고 말하는 그녀. 위험하지만 그만둘 수 없는 어떤 일종의 사명처럼 가능한 더 멀리 나아가야 하는 임무를 짊어진 것처럼 글쓰기를 생각한다는 그녀. 그녀는 ‘글을 쓰고’ 그렇게 쓰여진 ‘책들을 살고’ 있다. “오직 삶만이 있는 삶, 그 삶은 충분하지 않기”에.
칼 같은 글쓰기.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글들은 칼 같다. 자신의 삶에서 가차 없이 끄집어내는 그 무엇들에 나는 자꾸만 아프다고 느낀다. 나는 그 칼이 그녀에게로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로 향하고 있다는 생각에 아픈 것이다. 내 삶 속의 어떤 조건들을 그녀가 주저 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소설들이 닿아 있는 어떤 진실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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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그녀의 이름을 끊임없이 알고 싶은 이유는 ‘그것은 내 존재가 텅 비어버린 지금 그녀에게 속한 아주 작은 어떤 것을 빼앗아오는’ 행위인 것이다. 그녀가 집착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새 여자에 관해서다.
‘……그를 그녀에게 단단히 결합시키는 것은 에로틱한 동작들이 아니라, 그가 점심때 그녀에게 사다주는 바게트, 빨래통 속에 뒤섞여 있는 속옷들, 볼로냐 소스를 뿌린 스파게티를 함께 먹으면서 보는 텔레비전 뉴스 등이었다.’ (p.61)
하지만 이런 집착도 곧 시들해진다. 모든 감정이 그렇듯이 시간이란 존재에 그 힘을 잃어버린 채 점점 쇠퇴해져간다. 그녀도 그랬다. W의 또다른 여자에 대해 알고자하던 욕망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것은 바로 이 글. 그녀는 말한다. ‘글쓰기는 더 이상 내 현실이 아닌 것, 즉 길거리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엄습했던 감각을 간직하는 방식, 그러나 이제는 ‘사로잡힘’이자, 제한되고 종결된 시간으로 변해버린 그것을 간직하는 방식이었다.'(p.68~69)
<부끄러움>
현실을 추적하는 대신 현실을 생산하고자 하는 옛날 이야기는 꾸며내지 말 것. 추억 속의 이미지를 거론하여 번역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 이미지를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해 스스로 속살을 드러내는 자료로 취급할 것, 한 마디로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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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나의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내 의지나 욕망, 그리고 지적 능력이 개입되어 있는 행동(예측하고, 찬성하고 반대하고, 결과를 짐작하는)은 오로지 그 남자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p.10)
“나는 가끔 나와 정사를 나누며 보낸 오후가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일지 자문해보았다. 정사를 나눈다는 것, 그 자체일 뿐이었겠지. 어쨌든 또다른 이유를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나는 단 한 가지만을 확신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사람이 나를 욕망하느냐 욕망하지 않느냐 하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성기를 보면 당장에 알 수 있는 유일하고도 명백한 진실이었다.” (p.32~32)
“여러 가지 제약들이 바로 기다림과 욕망의 근원이었다.” (p.34)
“우리가 함께 사랑을 나누는 순간이 아니면 모든 것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더구나 나는 언젠가 그 사람이 떠나는 순간이 올 거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그 당시 나는 고통스러운 미래와도 같은 쾌락 속에서 살고 있었다.” (p.42)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p.72)
“나는 내 열정을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정당화되어야할 무질서로 여겨질 수도 있다. 나는 다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p.27~28)
아니 에르노, 그녀는 한 때 자신이 겪었던 폭풍같던 열정을 남들 앞에 정당화할 필요성도 설명해야 할 이유도 없다고 말한다. 그저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에서 소설을 시작하고 이끌고 마친다. 이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며 세상에서 유일한 소설의 소재이기도 하다. 감히 나는 아니 에르노같은 소설가가 되겠다고 그녀를 롤모델로 삼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내 삶에 있어 가장 격정적이었던 열정의 한때를 남의 이름을 빌려서가 아닌 내 이름으로 꼭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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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와 `어느 날'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제 3자 입장에서는 정당화하고 합리화해야 할 실수나 무질서로 여겨질 수도 있는 그 열정을 다만 있는 그대로 보이려 했던 그녀의 바람은 순수하며 그 순수함 때문에 불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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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자리>
이 이야기는 누군가의 아버지로 살아 왔던 한 남자의 삶을 되짚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소를 치는 목동에서 공장 노동자로, 또 소상인으로 조금씩 신분을 높여가기 위해 술도 입에 대지 않고 착실하게 살아온 남자. 다만 그는 자신은 미처 얻지 못한 공부를 할 기회를 얻은 사람, 즉 지식인으로 간주되는 사람에 대한 막연한 경외감과 열등감을 품고 살아간다. 다행히 자신보다는 배움의 기회가 많았던 딸은 점점 그가 동경하던 세계에 다다르지만 그럴수록 그들 사이의 거리는 더욱 멀어질 뿐이다. 딸에게는 잊혀 가는 존재이지만, 오히려 그는 많이 배운 딸은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한없는 희생으로 채우려 한다. 그가 죽음을 맞이한 뒤 수년이 지나 딸은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의 삶과 자신의 겪어 온 감정을 솔직하게 풀어 놓는다. ㅡ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왠지 좁은 길을 아슬아슬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사람들이 천하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 회복과 이런 작업에 수반되는 소외에 대한 고발 사이에 낀 좁은 길 말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들은 우리의 것이었고, 심지어는 우리의 행복이기도 했지만, 또한 우리의 조건을 둘러싼 굴욕적인 장벽들(「우리 집은 그렇게 잘 살지 못해」라는 의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행복인 동시에 소외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이렇게 표현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 모순의 이쪽에 닿았다, 저쪽에 닿았다 하며 흔들흔들 나아가는 느낌이라고 말이다. ---p.57
언제 이 꿈이 그 자신의 꿈을 대체해 버린 것일까?
그는 한 번 자신의 꿈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테라스와 커피 기계와 카운터가 있고, 주로 뜨내기손님들이 이용하는 멋진 카페 하나를 시내 중심가에 갖는 거였다. 하지만 그럴 만한 자본이 없었다. 새로 시작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체념했다. 어쩌겠는가. ---p.82
내가 아버지의 모습을 찾은 것은 사람들이 역 대합실에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방식, 그들이 역 플랫폼에서 아이들을 부르고, 누군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방식 가운데에서였다. 아무데서고 마주칠 수 있는 익명의 존재들은 그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힘이나 굴욕의 징표들을 지니고 있었고, 바로 이들에게서 난 아버지의 조건의 잊어버린 실체를 되찾을 수 있었다. ---p.113
내가 부유하고도 교양 있는 세계에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내려놓아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작업을, 난 이제 이렇게 끝냈다. ---p.125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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