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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명의 아티스트들이 기록한 지난 여름의 포트레이트. 그 ‘쨍한 사랑 노래.’


매해 찾아오는 여름. 그러나 한번 지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여름. 아홉 명의 아티스트들이 기록한 지난 여름의 포트레이트. 그 ‘쨍한 사랑 노래.’

에디터 | 이상현(shlee@jungle.co.kr)


question
1. 사진 속 이곳은 어디입니까?
2. 당신은 이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나요?
3. 결국 무엇이 카메라 버튼을 누르게 했습니까?
4. 당신에게 여름이란?



1. 2008년 여름 베를린의 풍경. 2007년 가을과 겨울, 2008년 봄과 여름을 그곳에서 보냈다.
2. 베를린에서 늘 그곳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사람들과 추억들, 그리고 사랑을 만났다.
3. 8월, 베를린 오후 6시의 빛이 그 사람의 옆모습을 섬세하게 기억하게 만들어 주었다. 사진 속 빛이 카메라 버튼을 누르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사랑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사소한 순간을 기억하는 것이 나에게는 사랑이다.
4. 가끔 내 자신이 여름이 된 것 같다고 느낀다.



1. 작업실 건물 앞, 창문으로 고개만 살짝 돌리면 보이는 곳입니다. 근면하지 못하기에, 밀린 일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2. 망중한(忙中閑)의 시간.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나, 내리쬐는 빛과 쏟아지는 비를 온전히 받아내는 건물들 사이에서 나만 덜렁 떨어져 나와, 호젓한 섬에 자리잡은 기분을 느낍니다.
3. 더 큰 것을 보고 앞으로만 나아가기 위해서 작고 소소한 것들을 시각에서 지워버리고, 그냥 지나쳐버리기 일수입니다. 가끔 나도 모르게 주변을 조용히 서서 지켜보다 보면 내가 놓치고 있던 어떤 순간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을 조용히 보고 서 있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4. 여름 밤의 한줄기 시원한 바람, 울림이 커지는 여러 가지 소리들, 그늘을 찾아 들어가서야 마주하게 되는 볕의 여러 가지 모양새들. 바쁜 틈 속에서도 이런 것들을 발견하는, 몸의 감각이 살아나는 계절. 바쁜 중에 그런 기분을 세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시간.



1. 서른하고도 한 해를 막 지나오던 때. 그때 내겐 여행이라는 도피처가 간절히 필요했었다. 끝 없는 안개 속 같던 현실의 시간들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결국 서른이 넘은 나이, 내 생애 첫 배낭여행을 결심하고 남미와 아프리카로 8개월간의 여행을 떠났다. 5개월의 남미여행을 마치고 도착했던 아프리카대륙의 첫 여행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 타운. 이곳 중앙역에서 해안을 따라 달리는 기차를 타고 가다 우연히 마주쳤던 뮤젠버그(Muizenberg) 해변은 꿈결같은 분위기에 이끌려 몇 번을 찾았던 곳이다.
2. 기차에서 내렸을 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듯 꿈인지 현실인지 착각이 들 정도로 몽환적인 풍경이 나를 이끌었다. 총천연색의 아주 기분 좋은 꿈, 오래도록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는 기분으로 이곳을 카메라에 담고 또 담았다.
3. 지난 여행사진 전시회 때 메인 포스터가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었을 정도로 뮤젠버그 해변은 내가 바라는 감성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셔터를 누르던 순간만큼은, 여행을 떠나게 했던 고단한 현실에서 나를 위로해주는 또 자유롭게 하는 그 무언가를 찾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4. 보사노바가 어울리는 계절. 그 이유 하나로 나는 여름이 좋다.



1. 이곳은 에메랄드 빛 바다로 둘러싸인 몰디브 섬. 사진 속 남자와 함께하는 허니문 여행.
2. 두 사람이 함께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바다에서 수영과 스노쿨링 그리고 시원한 맥주 한잔!
3. 한낮에 반짝거리는 바다와 스노쿨링을 즐기는 사진 속 남자를 기록한. 나의 여행은 사진과 그림으로 기록하는 한 권의 책이 된다.
4. 나의 여름은 여름 잠을 자는 휴식의 계절이다. 봄에 계획했던 새로운 일들도 잠시 접어두고 여행을 떠나거나 시원한 곳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는 계절이다.


1. 미국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 114번 도로와 103번 도로가 만나는 그 어디쯤. 늦은 나이에 공부 해보겠다고 타국에 와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다 지친 어느 날. 친구들과 바다를 봐야겠다며 낯선 거리를 정처 없이 운전하다 길을 잃었다.
2. 어느 한 가게 앞에 차를 세운 후 시원한 물 한잔으로 더위를 식히며 초점 없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3.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여름 하늘, 그 위를 파도 타듯 넘나드는 전선들, 교차로, 신호등, 전봇대, 간판, 그리고 파릇파릇한 잔디. 흔하디 흔한 모습인데 왠지 특별하게 보였다. 새로운 곳에 가게 되면 모든 것을 거리를 둔 채 낯선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길을 잃은 덕에 일상의 여행자가 되어 셔터를 눌렀다.
4. 여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하지만 일상으로의 탈출도 재미있지 않을까. 오랜만에 생긴 한 여름의 여유 속에서 일상을 새롭게 관찰해보는 것도 꽤 흥미롭지 않을까.



1. 머리 위로는 얽힌 전깃줄들이 하늘을 가리고, 양 옆으로는 붉은색 벽이 요새처럼 이어지는 삭막한 주택가 골목입니다. 이런 길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빨리 걸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간혹 눈길을 사로잡는 녹음의 무리. 옛 어부들이 망망대해에서 담수를 얻을 섬 하나를 발견한 기분이 이러했을까요. 나뭇잎이 담벼락을 넘어서, 하늘을 가득 메울 정도로 무성한 집 앞에서 저는 간혹 발걸음마저 멈추게 됩니다.
2. 정원 가꾸기를 좋아한다면 적어도 마음이 인색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한여름의 능소화나 가을의 국화를 보기 위해 이 집의 주인은 모종삽으로 흙을 파 뒤집고, 지저분한 곁가지를 잘라내었을 겁니다. 일년에 한 차례 피는 꽃과 많지 않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보낸 땀의 시간, 그리고 그 마음은 제가 본받고 싶은 어떤 것입니다.
3. 실재를 모사로 남겨놓으려는 욕구는 어쩌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 간사하게도 느껴집니다. 실재 이미지를 갖게 된다고 해서 그것에 깃든 정신은 내 것으로 만들 수 없으니까요. 어서 빨리 무언가를 이뤄보자는 마음이 가득하면서, 뜨거운 여름을 견디며 피워낸 꽃과 그것을 피우기 위해 드린 주인의 정성을 가져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4. 상반되는 감정들이 제대로 한판을 벌여보는 계절입니다. 그 싸움 사이에서 저는 이리저리 휩쓸려 지내는데 특히나 올 여름은 더 그렇습니다. 조금 더 선선해지면 그 역설적인 감정들도 점점 정리가 되겠지요.



1. 런던 근교의 전원 지방 코츠월드(Cotswolds). 2주간 런던을 여행하던 중 휴가가 끝나갈 무렵 찾아간 곳.
2. 렌트 카로 이곳 저곳을 돌아 다녔다. 카 오디오에선 게리 뉴만과 크라프트 베르크 등의 묵직하고 ‘댄서블한’ 일렉트로닉 음악들이 울리고, 창밖에는 고전동화 속에 나올 법한 천연 자연들이 번지듯 흐르고 있어 그 엉뚱한 조합 때문에 무척 신이 났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나오면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거나 풀을 밟으며 산책하고, 배가 고프면 아무 식당에 들어가 끼니를 때우고 맥주를 한 잔씩 마셨다. 런던에서와는 달리 굉장한 신선놀음을 하는 것 같이 평화롭고 달콤한 시간이었다.
3. 거의 발가벗은 아이들이 쉬지도 않고 이리저리 몰려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아까 본 애들이 아직도 놀고 있잖아?''하고 별다른 생각 없이 사진을 찍었는데, 찍고 보니 예뻐서 마음에 들었다. 만화를 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내 인생의 마음가짐이 어쩌면 저 애들처럼 속박 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노는 모양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깃들어 있을 수도. 사실은 잘 모르겠다.
4. 여름은 사계절 중 가장 싫어하는 계절이다. 덥고 습하고 끈적하고 어지러워서 여름에 약하다. 그래서 언제나 이맘때만 되면 얼른 이 계절이 지나길 간절히 원한다. 하지만 싫어하고 힘든 것을 견디고 나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리뉴얼 되어 있지 않을까. 나에게 여름은 마치 예방주사 같다.



1. 태안지역 해변입니다. 지금의 아내와 웨딩 촬영 중이었습니다. 석양이 사라지기 전에 촬영위치를 잡기 위해서 바쁘게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2. 아내와 둘이 서울의 선유도공원을 시작으로 한 1박2일간의 웨딩 촬영 여행 중 마지막 촬영지였습니다. 정말 운이 좋게도 아름다운 낙조와 붉은 석양으로 물든 풍경을 만났습니다. 빡빡한 촬영 일정에 힘이 들었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만났다는 것이 너무도 즐거웠습니다.
3. 힘든 줄도 모르고 석양으로 물든 모래사장을 이리 저리 뛰어 다니는 신부의 모습이 천진난만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밝은 성격, 당시의 즐거운 감정을 표현하기에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 될 것이라 예상하고 셔터를 눌렀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전해준 최고의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4. 여름은 열매의 옛말입니다. 여름이 없으면 열매도 없죠. 나에게 붉고 아름답고 달콤한 사진을 남길 수 있게 한 그 해의 여름은 열매입니다.



1. 인도네시아의 발리. 아름다운 바닷가 ‘양양.’ 그곳의 비밀 서핑 포인트다. 한국보다 크고 깔끔한 파도에서 서핑을 하고 싶어서, 그리고 그 사진을 찍기 위해 떠났다.
2. 사진만으로는 마냥 평화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이 사진을 찍고 몇 분 뒤 나는 그만 꼼짝 없이 조류에 갇히고 말았다. 몇 시간을 그렇게 표류하다 생명을 잃을 뻔 했다. 이렇게 죽다 살아나길 간혹 경험하지만 여전히 파도만 보면 스스럼없이 뛰어드는 건,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참 단순한 이유, ‘즐겁기 위해서’다.
3. 사진 속의 남자는 고등학교 후배 이길만. 친구들과 바다에 같이 떠서 파도를 기다리는 시간은 사진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정말로 최고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그들의 사진을 찍는 건 의무감이나 성취욕이 아니라 언제부턴가 만들어진 내 본능인 것 같다. 바다를 사랑하는 마음과 좋아하는 것을 내 손으로 표현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이 본능을 만들었다.
4. 지구는 공평하게 공전과 자전을 하므로 세계 어딘가에는 항상 여름이 있다. 나에게 여름은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공간적인 개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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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er of love

여름을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일년 내내 여름만 기다리고 산다. 다른 건 그냥 1월이고 10월일 뿐, 보통의 ‘월’로

가늠한다. ‘계절’이라고 불릴 수 있는 건 여름뿐이다. 하도 여름 타령을 하니 주변에선 한 해가 온전히 여름인 도

시로 이민 가라고 권한다. 하와이에서 서퍼들에게 구아바 주스라도 팔면 먹고 살수는 있을 거라고, 일년 내내 그

을린 채 정글북의 모글리처럼 살라고 부추긴다. 모르는 소리. 언제나 여름인 건 감흥이 없다. 여름을 바라고 원하

면서 살고 싶다.. 여름이 오는 기미를 슬슬 느낄 때부터 덜 먹고 더 걷는다. 아주 좋은 컨디션으로 여름을 보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고, 최대한 간단하게 옷을 입으려는 대비책이기도 하다. 계획은 대부분 수포로 돌아간

다. 냉면과 모밀과 맥주 탓이다. 냉면은 함흥식이건 평양식이건 집에서 열무김치 국물에 대충 만 것이건간에 전

부 다 맛있다. 겨자와 식초를 듬뿍 넣고 정신을 못 차리면서 먹는 걸 좋아하고 면이 너무 길어서 그걸 한번에 먹

느라 혼쭐이 나는 것도 신난다. 여름엔 보통 냉면, 모밀, 콩국수 삼종세트만 줄창 먹는다. 그래서 계절이 끝날

때쯤엔 올 여름엔 몇 그릇이나 먹었을까 혼자 세보기도 한다. 맥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미식가들은 맥주를

너무 차게 먹으면 호프의 본 맛을 알 수 없다고들 하지만, 됐습니다 됐고요. 틈날 때마다 대형 마트에 가서

맥주를 박스로 산 후, 냉장고 안에 꽉꽉 채워 넣고 온도를 최대한 낮춘다. 그러곤 기다린다. 다른 일을 하는

척하지만 마음은 온통 냉장고 안의 맥주에 가 있다. 캔이 거의 얼 지경이 돼서 꺼내고 나면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을 때, 그 때가 마시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다. 숨도 안 쉬고 단번에 꿀꺽꿀꺽 마신다. 머리가 쨍하고 깨질 것

같지만, ‘호호홍’하는 이상한 신음 소리가 저절로 난다. 밖에서 돌아오면 뛰어들 듯 샤워부스에 들어가 찬물을

벼락치듯 맞고 몸이 덜 마른 채 맥주를 마신다. 그럴 때마다 여름이어서 너무 좋다고 격정적으로 감탄한다.

여름 낮이 뜨겁고 울창하다면, 여름의 밤은 서늘하고 섹시하다. 낮의 열기로 들뜬 몸에 밤의 정서가 더해지면

맥을 못 추게 된다. 그래서 여름 밤의 충동은 어떤 성인군자도 못 이긴다. 기억 속 모든 아름다운 연애의

씬들은 다 여름이었다. 창을 열고 모기향을 피워놓고 둘이서 <더티댄싱>을 몇 번이고 돌려보던 일, 소슬한

마루에서 오랫동안 낮잠을 자던 일, 손을 잡고 산책을 하고 차가운 술을 마신 후 찬 입술로 어깨에 뽀뽀를

해주던 일, 머리를 덜 말린 채로 차에 앉아 온갖 창을 다 열고 서울 거리를 뱅뱅 돌던 일, 그리고 휴양지에서의

뜨겁고 끈끈하고 다정하고 부끄러운 기억들. 곧 여름이 온다는 건 소리로, 냄새로, 감촉으로 안다. 골목을 걷다가

그걸 딱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풀 냄새가 진해지고 공기는 갑자기 묵직해진다. 주변의 소리는 커지고 사방의

색깔은 온통 선명해진다. 안경을 물로 박박 닦아서 쓴 것처럼 눈 앞이 뻥 트이는 기분이 든다. ‘자연’이란 걸

단어나 문장이 아닌 몸으로 실감한다. 그렇게 여름이 온다.



글 강지영 지큐 패션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