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스웨터 먼지처럼 잔잔히 부서지던 햇빛, 백엽상 주위엔 한 뼘도 못 자란 풀들이 뿌리 뽑힌 채 말라가고 있었다 얼굴이 하얀 아이들 쫓아다니다가 일기장을 찢어 풍금 바람통 속에 넣어 두었다 돌 미끄럼틀 주위를 뛰어다니다 보면 자주 멍이 들었고 동물의 허파를 삶아 잘라놓은 듯 멍 자국이 둘레를 키워가는 동안 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빨아야 흘러나왔던 수돗물에 입술을 적실 땐 갑작스런 코피처럼 내내 떠나지 않았던 녹 비린내, 곧 여행의 끝이 오리란 걸 알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라도 시솔레 음계를 외며 어린 소녀가 철골 비계를 올라갔다 텅 빈 멜로디를 따라 바람통이 종이 쪼가리들을 날려 보냈다 온실 유리를 깨뜨렸고 복도 끝에선 오래, 호루라기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낡은 풍금들이 트럭에 실려 떠나가는 꿈, 깨진 유리 밑엔 난초가 만개한 꽃을 걸어놓고 부드럽게 썩어가고 있었다
잊어가도 사라지지는 않는 채 썩어가는 기억.
실타래가 풀리고 털실이 꿰어져가는 장면을 표현하려고 했는데
못했다. 집중하지 못하고 되는 대로 해버렸다.
어쩔 줄을 모르고 여기까지. 이렇게만.
12. 2. 4
"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팔을 흔들고 다니며, 시내가 강이 되고, 강이 되어 바다가 되었으면 했지. 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아이는 자기가 아이인지 몰랐고, 그에게 모든 것은 영혼이 있었고, 모든 영혼들은 하나였지. 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그는 아직 어느 것에도 견해를 갖지 않았고, 습관도 없었고, 책상다리로 앉았다가 뛰어다니기도 했고, 헝클어진 머리에 사진을 찍을 때 억지로 표정을 짓지도 않았지..." (페터한트케, 유년기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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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그 어떤 명예가 남았는가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몇 개가 남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주말의 동물원은 문전성시
야광처럼 빛나던 코끼리와
낙타의 더딘 행진과
시간의 빠른 진행
팔 끝에 주먹이라는 결실이 맺히던
뇌성벽력처럼 터지던 잔기침의 시절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곁눈질로 서로의 반쪽을 탐하던
꽃그늘에 연모지정을 절이던
바보,라 부르면
바보,라 화답하던 때
기억하는가
기억한다면
소리 내어 웃어보시게
입천장에 박힌 황금빛 뿔을 쑥 뽑아보시게
그것은 오랜 침묵이 만든 두 번째 혀
그러니 잘 아시겠지
그 웃음, 소리는 크지만
냄새는 무척 나쁘다는 걸
우리는 썩은 시간의 아들 딸 들
우리에겐 그 어떤 명예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죄다 풀리고야 말았다
(심보선,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나는 즐긴다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한 의문들을: 누군가를 정성들여 쓰다듬을 때 그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서글플까 언제나 누군가를 환영할 준비가 된 고독은 가짜 고독일까 일촉즉발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은 전체적으로 왜 지루할까 몸은 마음을 산 채로 염한 상태를 뜻할까 내 몸이 자주 아픈 것은 내 마음이 원하기 때문일까 누군가 서랍을 열어 그 안의 물건을 꺼내면 서랍은 토하는 기분이 들까 내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누가 나의 내면을 들여다 봐 줄까 층계를 오를 때마다 왜 층계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들까 숨이 차오를 때마다 왜 숨을 멎고 싶은 생각이 들까 오늘이 왔다 내일이 올까 바람이 분다 바람이여 광포해져라 하면 바람은 아니어도 누군가 광포해질까 말하자면 혁명은 아니어도 혁명적인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또 어떤 의문들이 남았을까 어떤 의문들이 이 세계를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하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또 어떤 의문들이 남았기에 아이들의 붉은 입술은 아직도 어리둥절하고 끝없이 옹알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