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hn berger, Ways of seeing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보는 것은 일종의 선택 행위다.
한 이미지는 x라는 사람이 y라는 대상을 어덯게 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된다.
작품의 상상적 차원이 풍부하면 할수록, 그것을 만든 예술가의 가시적 세계에 대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가능 성은 더 커진다.
과거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했을 때 필요한 결론들을 이끌어내는 일종의 샘물과 같은 것이다.
원작이 지닌 침묵과 고요함이라는 것은 실제 물질 즉 물감에 스며 있어서, 보는 이는 그 물질성을 통해 화가의 몸짓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화가가 그림을 그렸던 시점과 누군가 그 그림을 바라보는 시점 사이의 시간적 거리가 줄어드는 효과가 생겨난다.
"세상의 삶에서 한순간이 지나간다! 그순간을 잇는 그대로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리는 것! 바로 그 순간이 되고, 예민한 감광판이 되는 것... 우리가 본 것을 이미지로 남기고, 우리 시대 전에 나타났던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는 것..." 세잔
결백이라는 개념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 어떤 음모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그 음모에 대해 결백하다. 하지만 이 경우 결백하다는 것은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제는 결백과 지식(혹은 자연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의 구분이 아니라, 예술을 경험의 모든 측면과 관련시켜 보는 총체적인 접근방식과, 지배계급의 몰락을 아쉬워하며 이들에게 봉사하는 지식분자인 몇몇 전문가들의 비교주의적 접근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몰락이란 프롤레타리아 앞에서의 몰락이 아니라 거대기업과 국가라는 새로운 힘 앞에서의 몰락이다.) 진정한 문제는 '과거 미술의 의미가 마땅히 누구에게 속해야하는가'이다. 그 의미를 자신의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지배계급 사람들인가, 아니면 과거의 유물 전문가들이라는 문화적 위계질서에 의해서 정의도는 사람들인가.
시각예술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보호 영역 안에서 존재해 왔다. 본래 그 영역은 신비스럽고 성스러웠다. 하지만 그 영역은 물질적이기도 했다. 작품은 어떤 장소, 동굴이나 건물 그 안에, 혹은 그곳을 위해 그려졌다. 최초에는 제의의 경험이었던 예술적 경험은 삶의 나머지 부분과는 분리된, 정확하게는 그 나머지 부분을 지배하려는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나중에 예술의 보호영역은 사회적인 영역이 된다. 지배계급의 문화 속에 편입되는 사이 물지적으로는 궁전이나 저택 안에 고립되어 따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런 역사 내내 예술의 권위는 그 보호영역이 가지는 특정한 권위와 분리되지 못했다.
현대의 복제 기술이 해낸 것은 예술의 권위를 파괴하고 예술을 - 혹은 새로운 기술로 복제한 예술 이미지를- 그 어떤 보호영역으로부터 떼어낸 일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예술 이미지가 순간적이며, 도처에 존재하고, 실체가 없으며, 어디서나 얻을 수 있고, 무가치하며, 자유로운 것이 되었다. 이제 예술 이미지는 마치 언어처럼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예술 이미지는 삶의 주류예 합류했는데, 이제 예술 자체의 힘만으로는 더 이상 삶을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복제 수단은, 이제 대중들도 그런 복제 덕분에 한 때 문화적 혜택을 받은 소수들만 누릴 수 있었던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 제외하고는, 여전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환상을 끊임없이 선전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대중은 여전히 무관심하고 회의적인 상태로 남아있다.
이미지의 새로운 언어를 다르게 사용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 그 새로운 언어를 통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의 경험들을 더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이때 경험이란 개인적 경험뿐 아니라,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계라는 본질적인 역사적 경험을 말한다. 즉, 우리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경험, 우리 자신이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 그런 역사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경험 말이다.
과거의 예술은 더 이상 과거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미지의 언어가 들어섰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복제본의 저작권 문제, 미술 매체와 출판사의 소유권 문제, 공공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정책 같은 문제로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이런 문제들은 극히 작은 전문적인 문제인 것 처럼 보이는데,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현재의 위기가 훨씬 광범위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잇다. 스스로의 과거와 단절된 개인이나 계급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개인이나 계급에 비해, 선택이나 행동을 함에 있어 훨씬 덜 자유롭다. 바로 그 점이 과거의 예술 전체가 이제 정치적 문제가 된 이유-단 하나의 이유-이다.
-
요즘 나는 전에 없이 바쁘고, 전에 없이 말이 없다. 바쁘기는 일브러 바쁘게 일을 벌려놔서 고생인데, 말은 그냥 없어졌다. 말을 조금이라도 늘어놓고 나면 금세 부끄러워진다. 이전에는 아무말이나하고 대화의 물꼬를 트기를 좋아했는데 이제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안말한다. 그래서인지 대체로 마음은 편하다. 그리고, '본다'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무엇을 보는가는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증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 스스로 왜곡되거나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보는 힘'의 효용은 모르겠다. 삶을 풍요롭게 할 수도 있고, 허상을 이뤄 제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아는 것이 힘인가? 어설피 알아서는 모르는만 못하다는 것도 느낀다. 효용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역설로 느껴지기도 한다. 집중력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미술관'을 떠올리는 장소가 교육정도/ 직업에 따라 다르다는 조사 결과가 당연한데도 흥미로웠다. 육체노동자는 66%가 교회이고, 숙련, 사무직 노동자는 교회가 45% 도서관이 34%이며, 전문직, 고위 영직은 교회와 도서관이 각각 30.5%, 28%에 이어 보기에 제시된 장소중에는 없다라는 답이 19.5%로 뒤를 잇고 있다.
어제 두 친구를 만나서 한두 시간 정도 얘기를 나눴다.
광기/연민
분위기
토리노의 말과 펠리체의 카사노바.
2013 05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