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
내 인생의 모든 일들을 전부 취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일들을 초래한 실수들이 내가 한 실수들이 아니라면 무슨 권리로 내가 그것을 취소할 수 있겠는가? 사실 내 엽서의 농담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을 때 잘못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 이런 실수들은 너무도 흔하고 일반적이어서 세상 이치 속에서 예외나 '잘못'도 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순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한 것이란 말인가? 역사 자체가? 그 신성한, 합리적인 역사가? 그런데 왜 그런 실수들이 역사 탓이라고 해야만 할 것인가? 인간으로서의 나의 이성에만 그렇게 보일 뿐, 만일 역사에 자기 고유의 이성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 이성이 인간들의 이해를 신경쓸 것이며 여선생처럼 꼭 진지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역사가 장난을 한다면?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p.483
사람들은 대부분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p.493
쿤데라,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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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이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여전히 계약의 용법을 따르면서 사랑은 애초부터 불공정 계약, 손해보는 거래라고 본다. 아무리 사랑에 빠져 있어도 우리는 남몰래 편익비용 분석을 행하고 ‘사실은 내가 피해를 보고 있지만 사랑하니까 감수해야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습관은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속 물 문화에 빠져 있는가를 보여줄 따름이다. 나는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기 위해, 비위를 맞추기 위해, 기쁘게 해주기 위해,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약해진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과 밀고 당기기를 하느라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전쟁 같은 삶을 버텨왔던 힘이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에 빠져 있을 때 강해진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배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계약의 규칙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져서이다. 요컨대 사랑은 소위 편익비용 분석이라는 계산의 완전한 폐지에 대한 상상이며 그 상상의 실현이다.
따라서 사랑은 가장 약한 자가 펼치는 가장 치열한 싸움이며 이 싸움은 때로는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서도 수행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므로 당신이 원하고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주지 않겠다”는 문디의 말은 실은 사랑의 언어인 동시에 투쟁의 언어인 것이다. 나는 문디에게 말한다. “내가 속물이라면 당신은 나와 끝까지 싸워야 할 거예요.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당신의 영향력 아래서 변화하게 될 거예요. 당신은 나에게 내가 모르는 미래의 정체성을 선물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문디는 나에게 말한다. “당신도 내가 속물처럼 행동할 때 나를 떠나지 말아요. 나에게 원하는 것을 주겠다며 협상하려고도 하지 말아요. 바로 그때 당신은 나를 믿지 말고 사랑을 믿어야 해요. 당신은 나를 지키지 말고 사랑을 지켜야 해요. 그게 바로 나를 위하는 길이니까요.” http://webzine.moonji.com/?p=5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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