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키냐르, 빌라 아말리아
95
그것은 다른 시간이리라. 그 시간을 다른 여인이 살게 되리라. 그 시간은 다른 세계에 존재하리라. 그 세계가 다른 삶을 열어주리라.
(... 잃어버린 시간도, 되찾은 시간도 아닌, 언어의 밖에, 음악안에 현존하는 시간... 진실에 가까운 내면의 삶, 스스로 열리는 자.)
98 (집을 정리하고 떠날 준비를 마쳐가는 장면)
새삼스럽게 자신의 방을 기꺼운 마음으로 둘러보았다. 봄이면 창문이 느릅나무의 무성한 잎들에 묻히곤 했다.
*
그녀는, 베갯잇을 갈아 아주 말쑥해진 베개에 등을 기댄 채, 느릅나무의 헐벗은 가지들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지들 틈새로 보이는 조각난 하늘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햇빛이 환해서 하얗게 보였다.
일어난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더 가져가려던 몇 가지 물건을 챙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욘에 갈 예정 없이 맞는 첫 주말이었다. 어두워질 때까지 누워 있었다.
어둠과 더불어 다시 불안이 찾아왔다.
도주의 욕망도 동반자처럼 함께 찾아들었다.
그것은, 날마다 햇살이 어둠 속으로 스러지는 순간이면 느껴지는 불안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
그녀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젠 나에게 가정이 없는 거로구나.'
가정(우리의 잘못이 용서받고, 우리의 결함이 용납되는 장소)은 정원 한가운데서 불타고 있었다.
한가한 오후가 되자, 불현듯 루브르에 가고 싶었다. 수많은 아름다움 속에서 떠도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서였다.
...
121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치 아기 우는 소리 같았다. 그녀는 눈을 떴다. 머리맡의 전등을 켜고 시계를 보았다. 3시였다.
그 고양이들과 멀리 떨어진 테라스에서, 다른 두 마리가 야옹거리며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주고받고, 괴성을 지르고,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는 돌아누웠고, 바로 옆에서 숨을 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목덜미에 까끌거리는 짧은 머리칼의 야릇한 감촉이 느껴졌다.
커다란 육체의 따스한 품으로 파고들어 가 둥글게 몸을 말았다. 그의 체취가 좋았다.
움푹 팬 그의 목덜미가 부드러웠다.
그곳에서 그녀는 다시 잠들었다.
*
우리에게 걸맞지 않은 이들은 우리에게 충실하지 못하다.
지금 꾸는 꿈속에서 그녀가 바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 곁에 있어서 그들에게 두려움이나 태만, 의기소침, 퇴행, 어리석음이 생긴 게 아니었다.
우리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욕조 안에 몸을 뻗고서, 침대에 누워서, 마비되었거나 부재하는 존재를, 우리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그들을 지켜본다.
그들을 버림으로써 우리가 저버리는 것은 그들이 아니다.
그들의 무기력이나 불만이, 우리가 그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기도 전에, 우리를 저버렸던 것이다.
코모 호수에서 어둠이 걷혔다.
그녀는 별 어려움 없이 세번째 국경을 넘었다.
*
만일 운명이란 것이, 자신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장소에서 생겨난 충동이라면, 그래서 한 존재를 사로잡고, 그 존재가 충동의 본성을 한순간도 깨닫지 못하면서 그것을 따르게 되는 것이라면, 그녀에겐 운명이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자각한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나는 결연히 그곳으로 달려간다. 어떤 것이 내게 결여된 그곳에서 내가 헤매고 싶어지리라는 느낌이 든다."
150
어느 날,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일을 하고 있던 농사꾼 아낙은, 이스키아 포르토의 젊은 여자 관광객이 다시 자신을 찾아와 귀찮게 굴자, 짜증이 나서 벌컥 화를 냈다. 제발 귀찮게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심지어, 말귀를 알아듣게 할 셈으로, 그녀에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안도 언성을 높였고, 산안젤로 아낙의 두 손을 꽉 부여잡고서 자신도 분통을 터뜨렸다. 터무니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꼭 우리 어머니 같으세요! 엄마처럼 나한테 소리를 지르시는 군요!"
그러자 늙은 아낙이 울음을 터뜨렸다.
두 여자는 손을 맞잡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농가 안으로 들어갔다. 아페리티프용 포도주 한 잔에 설탕 뿌린 비스킷을 적셔 먹으며, 각자 살아온 불행한 인생 이야기를, 이기적이고 색정적이고 권위주의적이고 겁 많고 한심한 남자들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두 여자는 육체처럼 늙어가는 행복들을 떠올렸다.
(안은 이 아낙의 빌라에 머물게 된다.)
156
그녀는 지아 아말리아의 집을, 테라스를, 만을, 바다를 열정적으로, 강방적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모든 사랑에는 매혹하는 무엇이 있다. 우리의 출생 한참 후에야 습득된 언어로 지시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된 무엇이 있다. 한데 그토록 그녀가 사랑하는 대상은 이제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오라고 부르는 집이었다. 그녀가 매달리녀는 산의 내벽이었다. 풀과 빛과 화산암과 내부의 불이 있는 후미진 곳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살고 싶었다. 용암의 상부 돌출부에 이를 때마다 매번, 강렬하고 임박한 어떤 것이 그녀를 맞이했다. 그것은 행복감을 주는 정체불명의 존재 같은 것이었다. 그 존재가 어떻게 그녀를 알아보고, 안심시키고, 이해하고, 알아듣고, 인정하고, 편들고, 사랑하는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166
모든 연인은 두려워한다. 그녀는 자신이 집에 어울리지 않을까 봐 몹시 두려웠따. 공사를 벌이는 것이 제대로 행동하는 것인지 몰라 두려웠다. 집의 매력을 손상시킬까 봐 두려웠다. 균형을 깨뜨릴까 봐 두려웠다. 실망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처음 빌라를 보았을 때 예상한 만큼 행복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봄이 두려움을 쓸어냈다.
봄은 커다란 야생 재스민 꽃이었다.
장미꽃 봉오리였다.
아름다운 꽃자루가 달린, 색이 아주 진한, 수없이 많은 아네모네였다.
양귀비였다.
그녀는 브르타뉴를 떠올리게 하는 차가운 바다에서 수영하는 걸 좋아했다.
봄이 오자 물이 더 따스하고 그늘이 더 많이 지는 바다에서 지치도록 수영하는 게 좋았다. 피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일종의 행복감, 육체적 황홀경을 느끼게 해주었다. 초록 혹은 파란 바다가 어깨 위로, 목덜미로,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고, 흐름과 힘으로 그녀를 감쌌다. 그녀는 크롤로만 헤엄쳤고, 기진맥진해서야 돌아갈 생각이 났다. 그러면 하늘을 보고 누운 자세로 꿈을 꾸며 천천히 돌아왔다. 여전히 누운 채, 바위에 부딪히지 않으려고 몸을 살짝 틀면서 팔매 헤엄으로.
203
그녀들의 육체가 침묵을 만들어냈고, 그 안에서 그녀들이 살았다. 안 이덴의 몸을 불가사의한 친구인 양 에워싸고 있는 침묵이 어린 라드니츠키는 음악보다 더 좋은 듯했다. 침묵과 빛이 그녀들 주위로, 다리로, 배로, 상반신으로 몰려들며 기이하게도 강렬해졌다. 소리가 어찌나 잦아들었는지 그녀들의 존재감이 증대했다. 고양잇과 동물 주위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어린레나는 계속 그녀를 제 옆에 붙잡아두고 싶어했다.
대체로 만 두 살이 지나면 어린애는 쉽게 그리고 분명하게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마그달레나는 말을 잘하지 못했다. 안은 아이가 제 엄마의 신호를 기다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런 다음, 좀더 뜸을 들여가며, 처음에는 이해 불가능한 시간의 심포니를 공간 안에서 관현악으로 편곡할 수 있도록 말로 가르쳤다.
"왜냐하면 자연의 모든 것, 가령 새, 밀물, 꽃, 구름, 바람, 별들의 시간, 이런 것은 시간에게 자신의 시간을 말하기 때문이란다"라고 레나에게 설명했다.
레나는, 아연실색한 채, 새 친구가 속삭여주는 말들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며칠 만에 아이는 산꼭대기의 모든 장소를, 집 주변의 모든 삶을 소리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232
날씨가 어찌나 더운지 뱀들이 굴에서 나와 그늘로, 안마당으로, 뜨뜻한 물가의 테두리 돌로 나왔다.
거미들은 침대 밑으로 들어가 어둠과 서늘함을 찾았다.
사람들, 밤, 두려움, 기억.
236
테라스 맨 끝 계단에 앉아서, 토마토와 물소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그녀는 멀거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
안은 홛르짝 몸을 떨었다. 어린 레나가 옆에서 불안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우리 에쁜이."
"자요! 근데, 먼저 눈을 감아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손을 펴요."
안은 손을 폈다.
무척 가벼운 무엇이 느껴졌다.
"이제 눈을 떠도 돼요!"
손바닥에 놓인 젖니가 보였다.
안 이덴은 유명한 음악가일 뿐 아니라, 폭풍우를 부르는 위대한 샤먼일 뿐 아니라, 선물 세례를 받은 여인이기도 했다.
ㅡ
312
"난 이제 누구에게서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아. 어느 누구에게도 전혀 다라는 게 없어. 아무에게도 매이고 싶지 않아."
"넌 너무 잘난 척해. 재수가 없다고. 내 말은, 안......"
"말해."
"넌 못됐어."
"사실이야. 어릴 때, 학교에서, 베리와 너, 너희는 끊임없이 내게 그 말을 했어. 근데 지금도, 3년 전부터 넌 그말을 되풀이 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있잖니."
324
금욕. 22시 취침, 정각 4시 기상, 낮에는 절대 졸거나 꿈을 꾸지 말 것.
"여기 원주민들은 '꿈의 시간에 합류하기'라고 불러요."
331
"우리 결혼하자. 네가 작곡한 곡들과 네가 쓴 글들을 전부 꼬마에게 헌정하는 것처럼, 나도 아직 좀더 살기 위해 전부 너한테 헌정하고 싶어. 그래야 나의 마지막이 행복할 거야. 엘리안, 난 네가 필요해. 모든 걸 고통 없이 치르기 위해 네가 필요하다고. 지금 이순간이 지나면 우린 이런 말조차 결코 할 수 없을 거야."
"그래도 결혼은 좀......."
"부탁이야. 말이야 아무려면 어때, 사랑, 결혼, 융합, 공생. 이런 단어가 필요하지 않은 옛날의 왕국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상대방이 자신에게 느끼는 욕구야. 수락할래?"
결국 그녀는 수락했다. 결국 그의 말이 일부 옳다는 생각에서였다. 사라짐으로써 고통으로 가득해진 왕국을 만들어내는 것은 자신에 대한 상대방의 욕망이었다.
그는 한 섬에서 한두 달 이상은 절대로 머물지 않았다. 한두 달이라는 기간은 그 좁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기 전에 그가 그 장소에 익숙해질 수 있는, 딱 그만큼의 기간이었다. 어느 날 어떤 멍청이가 그에게 “어이, 애송이, 자넨 도대체 뭘 해서 먹고 사나?”라고 물어올 때면, 그는 이제 더 이상 꾸물거리지 말고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뭘 해서 먹고 사냐니? 그건 정말 어이없는 질문이다. 당신도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그건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삶 자체를 하찮은 것으로 만든다. 만약 이렇게 말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 질문은 삶을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낸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또 다른 공물을 지불해야 한다는 듯이.
(로맹가리, 마지막 숨결, 그리스 사람 중)-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136
가면의 생
"나는 에밀 아자르예요!" 하고 나는 내 가슴팍을 두드려대며 외쳤다.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란 말이에요! 나는 내 작품의 아들이자 아비이기도 해요! 나는 나 자신의 아들이자 아비란 말이에요! 나는 아무에게도 빚진 것이 없어요! 나는 나 자신의 저자이며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나는 진짜예요! 속임수가 아니라고! 나는 위장이 아니에요! 나는 고통 받는 인간이에요. 더더욱 고통 받기 위하여, 내 책에, 세상에, 인류에게 더 많은 것을 주기 위해 글을 쓰는 인간이라고요! 내 작품에 관한 한 나로서는 감정도, 가족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작품뿐이에요!" 203
전쟁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나는 항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느낌을 가지고 위험과 대면하였다. 어떤 일도 내게 일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어머니의 해피엔드이므로.-
황금시대사고의 오류는 딴 시대가 현 시대보다 낫다. 이게 그런 현재의 고난을 잘 대응하지 못하는 낭만인들 사고의 결함이지.
(미드나잇인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