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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 정체성

■● 2012. 2. 9. 21:43

아기를 갖고 동시에 이 세계를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http://www.munjang.or.kr/mai_multi/djh/content.asp?OutStr=09_52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멍허니 바라보기만 했다. 남자들이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아서 슬프다고?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난 뭐야? 난 말이야? 당신을 찾아 해변을 수킬로미터씩 헤맸고, 울면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고, 당신을 따라 지구 끝까지라도 뛰어갈 수 있는 나는 뭐지?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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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르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꼬냑 병과 술잔 두개를 가지러 갔다. 한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 그는 내가 열여섯 살 적에 했었을 말을 상기시켜 주었어. 그 순간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맺고 있는 우정의 유일한 의미를 깨달았어. 우정이란 기억력의 원활한 작용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이야. 과거를 기억하고 그것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듯 자아의 총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거야. 자아가 위축되지 않고 그 부피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화분에 물을 주듯 추억에도 물을 주어야만 하며 이 물주기가 과거의 증인, 말하자면 친구들과 규칙적인 접촉을 요구하는 거야. 그들은 우리의 거울이야. 우리의 기억인 셈이지.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란 우리가 자아를 비춰볼 수 있도록 그들이 이따금 거울의 윤을 내주는 것일 뿐이야.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 때 무슨 짓을 했건 알게 뭐야! 내 어린 시절부터, 아마도 유년기부터 내가 항상 갈구했던 것은 전혀 다른 것이야. 그것은 모든 다른 가치보다도 위에 놓인 우정이지. 진실과 친구 사이에서 나는 항상 친구를 택했노라고 즐겨 말했었어. 도발삼아 말하곤 했지만 그것이 나의 진심이기도 했지. 지금은 그런 격언이 케케묵었음을 나도 알아. 파트로클레스의 친구인 아킬레스나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나 심지어 주인과의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진정한 친구였던 산초에게나 통할 말이지. 그러나 우리에겐 더이상 통하지 않아. 내 비관주의가 너무도 심화되어 지금은 우정보다 진실을 택할거야.」

「 우정은 내게 있어서 이데올로기, 종교, 국가보다도 더욱 강한 뭔가가 존재한다는 증거였어. 뒤마의 소설에서 네명의 친구는 종종 적대 진영에 가입해서 어쩔 수 없이 싸워야만 했지. 그러나 그 때문에 우정이 변질 되진 않았어. 그들은 각자 진영의 진실을 비웃으며 꾀를 내어 은밀히 서로를 도와왔지. 그들은 진실, 명분, 상관의 명령, 왕, 왕비 그리고 다른 모든 것보다도 우정을 앞세웠어 」

샹탈은 그의 손을 쓰다듬었고 그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야기 했다.

「뒤마는 삼총사의 이야기를 이백 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썼어. 우정을 상실한 세계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이미 그때부터 있었던 걸까? 아니면 우정의 실종은 보다 최근 현상일까?」

「 저는 대답할 수 없어요. 우정이란 남자들의 문제에요. 그건 그들의 낭만주의죠. 우리의 것은 아니죠. 」


「 우정이 어떻게 생기는 걸까? 필경 적대자에 대한 하나의 연대감, 그것이 없다면 그의 적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연대 같은 것일 거야. 아마도 이제는 이러한 연대가 더이상 필요없는지도 모르지 」

「 적이란 항상 있게 마련인데요 」

「 맞아 하지만 그 적은 눈에 보이지 않고 이름도 없어. 관료 조직, 법률 같은거야. 당신 창문 앞에 누가 공항을 건설한다고 결정하거나 혹은 당신이 파면을 당했을 때 당신 친구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겠어? 누군가 당신을 돕는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익명의 누구, 즉 사회 연대기구, 소비자 보호 연맹, 변호사 사무실 같은 거지. 어떤 시련으로도 더 이상 우정을 확인할 길이 없어.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친구를 찾아나서거나 도적떼로부터 친구를 구하기 위해 칼을 뽑는 것과 같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거야. 우리는 큰 위험이 없는, 그러니까 우정도 없는 삶을 헤쳐가는거야. 」

「 그게 사실이라면 F와 화해 할 수 있겠군요. 」

「 내가 그를 비난한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렸더라도 그는 왜 비난하는지 몰랐을 거야. 다른 사람들이 나를 공격할 때 그는 침묵했어, 그런데 문제는 내가 정당해야만 했어. 그는 자신의 침묵을 용기라고 생각했어. 심지어 그는 나에게 가해지는 집단적 박해에 끼여들지 않았다고 나에게 누가 될 어떤말도 하지 않았다고 자랑까지 했다더군, 그래서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고 내가 그를 아무 말 없이 만나지 않자 상처를 받았을 거야. 그에게 중립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이 내 잘못이었어. 그가 악의에 차고 흉악한 분위기 속에서 어줍잖게 나를 변호하려 들었다면 그 자신도 따돌림, 갈등, 어려움을 겪었을 거야. 내가 어떻게 그에게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겠어. 더구나 그는 내 친구였는데! 다른식으로 말하자면 그건 예의에 벗어나는 짓이지. 왜냐하면 과거의 알맹이가 빠져버린 우정은 오늘날에는 상호존중의 계약, 한마디로 예절계약으로 변질되었어. 그러니 친구에게 불편을 끼치거나 불쾌감을 줄 수 있는 것을 부탁하는 것은 결례가 되는거야 」

「 물론이죠. 하지만 그런말을 하는 당신도 씁쓸해 하진 말아야죠. 빈정거리지도 말고요. 」

「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진 않았어. 그냥 그렇다는 말이야. 」

「 만약 당신이 증오의 대상이 되고 누명을 쓰고 사람들의 먹이가 된다면 당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두가지 반응을 기대할 수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당신을 뜯어먹으려는부류에 합류하러 갈 것이고 다른 쪽은 점잖게 못 들은 척할 거에요. 물론 당신은 그들과 만나 대화할 수 있을 거에요. 점잖고 조심스러운 이러한 두번째 범주가 당신의 친구에요. 현대적 의미에서만 친구죠. 장-마르크, 이런 사실을 나는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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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외따로 떨어져 사랑하는 두 존재, 그건 아주 아름답지.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이 아무리 경멸할 만한 것일지라도 그들에겐 이 세계가 필요해.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p.88

첫번째 편지를 우편함에 넣을때만해도 다른 편지를 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는 아무런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고 어떤 미래도 겨냥하지 않았으며 그냥 그녀를 즐겁게 해주고 남자들이 더 이상 그녀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의기소침해진 상태에서 그녀를 당장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의 반응이 어떠할지 미리 상상해 보려고 들지도 않았다. 굳이 상상을 했다면, 만약 그녀가 그에게 편지를 보여주며 라고 말하면 시치미를 떼며 낯선 이의 찬사에 자기의 찬사까지 덧붙이리라는 상상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마침표가 없으니 연속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p.102

사랑하는 여자와 다른 여자를 혼동하는 것. 그는 얼마나 여러번 그런 일을 겪었던가! 그리고 항상 똑같은 놀람: 그녀와 다른 여자들과의 차이가 그렇게 미미한 것일까? 이 세상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실루엣을 어떻게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그는 방문을 열었다. 마침내 그녀를 보았다. 이번에는 털끝만치도 의심할 바 없이 그녀이지만 그런데 더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그녀 얼굴은 늙게 변했고 눈길은 이상하리만치 험상궂었다. 마치 해변에서 그가 손짓을 보냈던 여자가 이 순간부터 영원히 그가 사랑하는 여자로 탈바꿈한 듯했다.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그의 무력함에 대해 징계라도 받아야만 하는 것처럼.

'무슨 일이 있었지? 웬일이야?'
'아무일도 없어요'
'뭐라고? 아무 일이 없었다니? 당신이 몰라보게 달라졌잖아'
'잠을 설쳤어요.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그리고 아침 나정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요'
'나쁜 일이라니? 왜?'
'그냥 그랬어요.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말해 봐'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요'
그는 계속 추궁을 했고 그녀는 마침내 털어놓았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이해할수 없어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누가 꿈을 꾸었는가? 누가 이 이야기를 꿈꾸었는가? 누가 상상해 냈을까? 그녀가? 그가? 두 사람 모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현실 속의 삶이 이런 뻔뻔스런 환상으로 변형되었을까? 열차가 영불해협아래로 들어갔을 때? 그보다 일찍? 그녀가 그에게 런던행을 선언했던 아침일까? 그보다 더 먼저일까? 필적 감정사 사무실에서 그녀가 노르망디 카페의 남자 종업원을 만난 그날부터? 아니면 그보다 더 먼저일까? 장-마르크가 그녀에게 첫번째 편지를 보냈던 때였을가? 하지만 그가 정말 그 편지를 보냈을까? 아니면 단지 상상 속에서만 썼을까? 현실이 비현실로, 사실이 몽상으로 변했던 정확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 경계선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경계선이 있을까?


그리고 나는 자문해본다: 누가 꿈을 꾸었는가? 누가 이 이야기를 꿈꾸었는가? 누가 상상해냈을까? 그녀가? 그가? 두사람 모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현실 속의 삶이 이런 뻔뻔스런 환상으로 변형되었을까? 열차가 영불해협 아래로 들어갔을 때? 그보다 일찍? 그녀가 그에게 런던행을 선언했던 아침일까?

그보다 더 먼저일까? 필적 감정사 사무실에서 그녀가 노르망디 카페의 남자 종업원을 만난 그날부터? 아니면 그보다 더 먼저일까? 장-마르크가 그녀에게 첫 번째 편지를 보냈던 때였을까? 하지만 그가 정말 그 편지를 보냈을까? 아니면 단지 상상 속에서만 썼을까? 현실이 비현실로, 사실이 몽상으로 변했던 정확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 경계선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경계선이 있을까?
p.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