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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메리메: ‘카르멘’ / G. 마르케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2012. 3. 19. 04:33

1. P. 메리메: ‘카르멘’

 

여자는 쓸개즙처럼 쓰다 (화근덩어리이다). 그래도 두 차례 좋은 순간이 있다. 그건 여자와 잠잘 때이고, 그 여자가 영원히 잠들어버릴 때이다.” (팔라디스)

 

“선생님, 그 여자가 웃으면 아무도 말을 조리 있게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웃게 되기 때문입니다.” (86)

 

1. [카르멘의 ‘성스러움’]

 

사실은 여성에 대한 혐오의 이야기였던 것이 어떻게 오늘날 현대적 여성성의 신화로 변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오늘날 카르멘이 성스러움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문화적 맥락은 매우 복잡하다.

혼례의 침대는 남자에게 승리의 장소가 아니라 상실의 장소이다. 혼례의 침대 안으로 여자는 눕혀지면서 ‘여성’은 죽고 신부와 부인만이 남는다. 사랑으로 남자는 여자를 살해하고 만다. 그러나 남자의 그 사랑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건 바로 ‘여자’에 대한 열정이었다. 여자, 이 결코 신부와 부인이 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열정. 그 무엇은 그러나 혼례의 침대에서 남자들에 으해 스스로 살해 당하고 만다. 이 남자의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려는 것이 돈 후앙인가? 카르멘과 돈 후앙의 관계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은 화합될 수 있는 것일까?

Palladas는 말한다: “여자는 화근덩어리. 그래도 좋은 순간이 둘 있으니, 그건 여자와 잠잘 때이고, 여자가 영원히 죽어버릴 때이다” - 이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이 말은 여자에 대한 저주가 아니다. 그건 여자를 죽이지 않고 살리는 두 길을 알려준다. ‘여자와 잠자는 일’ -그건 남자에게, 남자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비의적인 그 무엇을 전수받는 희열의 순간이다. ‘여자가 죽어버리는 일’ - 그건 이 비의적인 무엇의 파괴성, 남자가 그토록 희구하지만 소유하면 그를 파괴하게 될 여자적인 것을 소유하지 않으려는 남자의 겸손이다. 두 경우 모두가 말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여자를 끝까지 존경하고 보호하고자 할 때, 남자에게 주어지는 두 가지 가능성이다.

 

2. [공포와 매혹 (Horror und Facination): 존중의 성스러움과 위반의 성스러움]

 

왜 카르멘은 공포의 대상이면서 매혹의 대상인가. 즉, 왜 성스러운 대상인가. 이는 ‘성스러움’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 R. Otto를 따라 성스러움이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정의된다면, 이 성스러움은 R. 카이유아를 따르며 ‘존중의 성스러움 (기독교적 모럴)’과 ‘위반의 성스러움 (에로틱의 주체)’이 있다. 존중의 성스러움으로 보면 카르멘은 비도덕적이고 그래서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다 (악마). 그러나 그러한 카르멘은 다시 위반의 성스러움으로 보면 에로틱의 여신이다 (여신).

카르멘은 존중의 성스러움에 의해 창녀와 매춘부일 뿐이지만, 그러나 끊임없는 매혹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그 매혹은, 위반의 성스러움은, 도덕은 위반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매혹의 노예가 되는, 즉 위반의 피할 수 없음과 그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하는 알리바이의 역할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매우 변증법적인 카르멘의 이중성을 만날 수 있다. 카르멘을 창녀와 매춘녀로 만드는 것은 그런데 무엇인가? 그건 다름 아닌 모든 남자를 사랑하기, 즉 ‘무제한적인 이타주의’다. 그런데 무제한적인 이타주의는 성모 마리아의 캐톨릭적 본질이기도 하다. 캐톨릭의 마리아들이 카르멘을 창녀라고 비난한다면 그건 어쩌면 시기와 질투의 소산일 수 있다. 왜냐하면 캐톨릭 모럴의 무의식은, 자기보존본능의 이기주의는, 결코 카르멘의 절대적 이타주의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리아들은 그들이 갖고자 하는 바로 그 미덕을 카르멘이 훔쳐갔다고 생각하면서 카르멘의 미덕을 창녀의 부도덕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3. [돈 호세 혹은 존중의 성스러움]

 

‘존중의 성스러움’의 모델을 따라서 ‘카르멘’을 읽으면, 이 이야기는 “‘몹쓸 여자’인 카르멘에게 유혹 다해서 일생을 망치고 마는 ‘착한 돈 호세’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된다. 비제는 미카엘라를 등장 시켜 호세-카르멘의 짝으로 호세-미카엘라를 대립항으로 설정하면서 ‘존중의 성스러움’ 모델을 오페라의 중심에 세운다. 그러나 메리메의 소설 속에서 호세에게 미카엘라는 없다. 오로지 카르멘만이 있을 뿐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의 미약’은 더 이상 ‘존중의 성스러움’이 아니다 (트리스탄 이후 사랑의 미약은 언제나 존중의 성스러움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위반의 성스러움’이라는 이름의 미약이 있을 뿐이다. 사랑의 미약 -그건 그 어떤 제3의 매개항이 아니다. 카르멘 자체가 사랑의 미약이다. 카르멘의 여자적인 것, 무제한적인 ‘관능성’, 그것이 호세에게는 사랑의 미약이다.

 

4. [카르멘 혹은 위반의 성스러움]

 

카르멘의 매혹은 the Uncanny (das Unheimliche)의 매혹이다. 그 매혹은 두려움과 이끌림의 중첩 현상인 ‘으스스함’의 매혹이다. 존중의 성스러움을 위험스럽게 만드는, 도덕 내 자기보존의 의식을 불안하게 만드는, 그러나 그것이 다름 아닌 억압을 통해 망각해 버린 태고적 혼음상태의 친숙함에 대한 ‘기억의 흔적’이므로 자력처럼 끌어당기는 또 하나의 성스러움인 그 무엇은 카르멘을 ‘으스스한 여자 (die unheimliche Frau)’로 만든다. 그런데 이 으스스한 친숙함은 구체적으로 카르멘의 어떤 속성들일까?

 

1) 카르멘은 무엇보다 ‘순종하지 않는 여자’이다. 이 순종하지 않음이 ‘자유’라면, 이 자유는 부르주아 여성과 매춘부를 나누는 이분법을 무효화 시키는 카르멘의 특별함이다. 귀부인과 매춘부는 다 같이 ‘순종 한다’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카르멘은 순종을 통한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그녀의 자유는 매개적인 것인 아니다. 그건 직접적인 것이다. 그녀의 자유는 직접적인 자유이므로 그 어떤 가치를 통해서도 제어되지 않는다. 카르멘은 “자유에의 열망이 사랑에의 열망보다 앞서는 것”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증거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성스러움). 사랑받아야 마땅한 것은 다름 아닌 ‘자유’인데, 그러나 부르주아의 도덕에서는, 사랑 받아야 마땅한 것이 ‘사랑’이 된다. 그렇게 자유는 사랑의 이름으로 승화되면서 사랑받을 권리를 박탈당한다. 때문에 사랑의 이념에 대한 카르멘의 위반이 ‘악’이라면, 그 악은 다름 아닌 본래적 ‘선’에 대한 역설적인 존중이며 찬양이 된다. 여기서 위반의 성스러움은 본래적 의미에서 존중의 성스러움과 겹쳐진다...

 

2) 말 대신 꽃으로 ‘때리기’그러나 이 때리기의 폭력은 ‘배려의 도발’이다 (뒷걸음 치는 호세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이 배려의 폭력은 ‘여성 고유의 폭력성’과 직결된다. 디오니소스 축제의 여제관들의 폭력.

 

3) 호흡 대신 웃음. 그러나 그 웃음은 아무 것도 존중하지 않는, 모든 권위를 무시하는 ‘눈부신 폭소’라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4) 시간의 교환가치 대신 사용가치를 알고 있는 여자. 시간을 교환법칙에 따라서만 일고 있는 호세는 ‘권태’에 빠진다. 그러나 카르멘은 ‘시간의 미풍’을 알고 있다. 그것이 그녀의 노래고 춤이다. 시간의 사용가치는 권태와 지루함을 모른다. 다만 즐김과 오락만을 알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락과 즐김’은 오래 된 권태와의 변증법적 밧줄을 풀어 버린다. 카르멘에게 즐김은 권태를 이기기 위한 무엇이 아니다. 파스칼 이후 인간의 악습이 되어버린 권태는, 비록 그것이 ‘권태의 의미’를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해도, 언제나 반 카르멘적이다. 카르멘에게 오락은 권태에의 저항이 어니다. 카르멘에게 ‘권태’라는 단어는 없다. 오직 시간의 향유, 즉 오락만이 있을 뿐이다.

 

5) 낭비하는 여자: 모스의 '증여론'/ 바타이유의 '에로스' 참조

 

6) 기질의 여자: ‘자기 안에 편안하게 머물기’

 

7) 죽음에 승리하는 여자: 카르멘은 사람의 자유에 충실한다. 그럼으로써 삶을 모두 탕진한다. 그러한 자유는 그러나 책임질 일들을 불러온다.그 책임을 그녀는 피하지 않는다. 그는 삶이 부과하는 책임을 모두 갚는다. 죽음을 통해서. 그렇게 삶과 죽음은 자유의 수행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관계로 긍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죽음에 대한 삶의 승리를, 죽음의 패배를 인증한다: “두 번 째 찌르자 그 여자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 커다란 검은 눈이 아직도 선합니다. 그러다가 그 눈은 흐려지더니 감기고 말았습니다.”





2. G. 마르케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성당의 종소리가 7시를 알렸을 때, 장밋빛 하늘에는 아주 밝은 별 하나만이 떠 있었다. 배는 처량한 작별의 고동을 울렸다. 그러자 나는 내 사랑이 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모든 사랑들로 목이 메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는 로사 카바르카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73)

 

“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할 때 필요한 위안에 불과할 뿐이오.” (93)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예요?” 그러자 여선생님은 말했다: “얘야, 그걸 모르겠니? 그건 모두 산들바람 때문이란다.” (99)

 

“새해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함께 살며 함께 잠을 깨는 사람들처럼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눈을 뜨지 않고도 들을 수 있도록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터득했고, 그녀는 그런 나에게 육체라는 자연의 언어로 화답했다.” (101)

 

[창녀 혹은 창녀질]:

창녀란 누구일까 혹은 무엇일까. 왜 일군의 예술가들 (생의 다른 얼굴을 알고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유곽에서 집을 찾고 창녀에게서 뮤즈를 찾는 것일까 (‘그들은 창녀들의 엉덩이를 만지며 그림을 그렸다...’).

창녀는 몸을 파는 여자들, 돈을 받고 대신 몸을, 쾌락을, 주는 여자들이다. 그런데 분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돈과 육체를. 창녀들의 육체로부터 돈을 분리하면, 그녀들의 육체는 이 세상에서는 허락되지 않은 어떤 특별한 육체의 소유자들이 된다. 즉 누구에게나 자기를 주는, 자기가 없는, 오로지 주고 따르고 순응할 줄만 아는 그 어떤 육체...

그런데 이런 질문: 창녀의 육체가 따로 있는 것일까. 이 부드러운 육체는 자연적인 것일까 아니면 문화적인 것일까. 다시 묻자면: 창녀는 태생적인 여자일까 (순응의 육체를 타고난), 아니면 다른 무엇에 의해서, 즉 돈에 의해서 그렇게 길러지는 것일까. 만일 후자라면, 돈이 창녀의 육체를 길러내는 기제였다면, 그렇다면 또 돈은 무엇인가, 더 정확히 돈과 창녀의 육체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이 반드시 ‘몸을 파는’ 일만일까? 아니면 돈과 육체 사이에는 그 어떤 특별한 교환관계, 모종의 ‘정당한 교환관계’가 내재하는 것일까? 물론 이 담론은 매우 위험스럽다. 그러나 한 번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돈과 창녀를 구분한다. 이 구분은 동시에 섹스와 사랑의 구분으로 전이된다. 90살의 주인공은 평생 동안 창녀들과 놀았지만 공짜로 논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돈을 지불했다. 심지어 집안 일을 도와주는 여인에게까지도. 이 소설은 이 노인으로부터 또 하나의 노인, 돈을 주지 않는 여자와의 관계를 발견하는 노인을 분리해 낸다. 그럼으로써 이 두 노인 사이에는 경계가 그어진다. 그 경계가 섹스와 사랑의 경계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조금 더 복잡하게 읽으면 창녀와 14살 소녀, 섹스와 사랑 사이의 이 국경선은 조금 모호해진다. 이 남자는 왜 평생을 돈을 지불하면서 창녀들과 지냈을까? 물론 이 특별한 고집은 그가 고수하는, 물론 이유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순수한 원칙’, 그러니까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사랑에 대한 본질적인 불신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기만 할까? 만일 그 불신이 문제라면, 그에게는 또 하나의 가능성, 그러니까 이 창녀질을 일찍이 그만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왜일까, 무엇 때문일까, 이 강박적인 창녀질은?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잇을 것이다. 창녀질 속에서는 세상에는 없는, 다만 창녀질 속에서만 서식하는 그 어떤 특별한 것, 나중에 노인이 14살 소녀의 아직 돈과 교환되지 않은 육체로부터 발견하는 그 무엇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거리고. 그래서 그는 평생 동안 창녀질을 멈출 수 없었던 거라고. 그리고 90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은 거라고. 자기가 왜 창녀질을 멈출 수 없었는지를, 그 창녀질 속에서 그가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 발견의 변증법을 분명히 하는 건 창녀와 소녀가 겹쳐지는 매개 영역이 다름 아닌 창녀질이라는 사실에 있다. 즉 노인은 창녀와 무관한 소녀를 만나는 게 아니다. 노인은 창녀질을 통해서 소녀를 만난다. 그런데 이 창녀질은 이 전의 창녀질과 전혀 다른 여자를 그에게 데려 온다. 한 번도 창녀가 되 본 적이 없는 창녀를, 14살 소녀를. 그런데 이 소녀는, 창녀-소녀는, 창녀들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소녀가 아닐까. 이 소녀가 창녀들 안에 살고 있었고, 노인은 평생 이 소녀를 찾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노인은 평생 창녀질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라. 그래서 이런 문장들은 아름답다: “ 성당의 종소리가 7시를 알렸을 때, 장밋빛 하늘에는 아주 밝은 별 하나만이 떠 있었다. 배는 처량한 작별의 고동을 울렸다. 그러자 나는 내 사랑이 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모든 사랑들로 목이 메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는 로사 카바르카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73) 그리고 또 이런 문장: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예요?” 그러자 여선생님은 말했다: “얘야, 그걸 모르겠니? 그건 모두 산들바람 때문이란다.” (99)

이 소설은 돈 담론이기도 하다. 그 담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돈을 슬프고 창녀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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